2018년 8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23세 이하 선수들이 나서는 아시안게임에 손흥민이 와일드카드로 합류했다. 완장도 그가 찼다. 김민재·황인범·황희찬 등 훗날 한국 축구의 황금세대로 불릴 후배들과 본격적으로 한 팀이 된 대회였다. 후배들에게 손흥민은 신(神)에 가까웠다.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대선배와 같은 라커룸을 쓴다는 것만으로도 들떴다.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말레이시아에 1-2로 덜미를 잡혔다. 손흥민은 후배들을 질타했다고 한다. 손흥민에게 그 대회는 병역이 걸린 대회였다. 평소보다 신경이 날카로웠을 것이다. 한국은 결승에서 일본을 연장 끝에 2-1로 꺾었고, 넷은 모두 금메달과 함께 병역 혜택을 받았다. 해피엔딩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여름 라커룸에 간 금은 8년이 지나도록 메워지지 않았다.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축구 조별리그 3차전 키르기스스탄전에서 골을 넣은 손흥민(왼쪽)과 손을 맞잡은 황인범. 뉴스1 사진 크게보기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축구 조별리그 3차전 키르기스스탄전에서 골을 넣은 손흥민(왼쪽)과 손을 맞잡은 황인범. 뉴스1
팀 내분설은 이달 초 불거졌다. 본지가 1996년생 김민재·황인범·황희찬이 일부 동료에게 대표팀 은퇴 의사를 밝혔다고 보도한 뒤다. 21일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정연욱 의원이 축구대표팀 일부 선수가 주장 손흥민을 이름 대신 등번호 “7번”이나 “그분”으로 부른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용수 대한축구협회장 직무대행도 갈등설을 사실상 인정했다.
주장이자 최고참에 대한 존중은커녕,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꺼릴 만큼 팀워크가 깨졌다는 얘기다.
지난 6일 우즈베키스탄과 평가전이 끝난 뒤 단체 사진을 촬영하는 축구대표팀. 손흥민과 이재성은 맨왼쪽에, 김민재와 황희찬, 황인범은 맨 오른쪽에 섰다. 사진 KFA TV 캡처 사진 크게보기 지난 6일 우즈베키스탄과 평가전이 끝난 뒤 단체 사진을 촬영하는 축구대표팀. 손흥민과 이재성은 맨왼쪽에, 김민재와 황희찬, 황인범은 맨 오른쪽에 섰다. 사진 KFA TV 캡처
92라인과 96라인
대표팀 라커룸은 사실상 두 갈래다. 92년생 손흥민·이재성을 축으로 한 ‘92라인’, 그리고 ‘96라인’이다. 96라인을 따르는 선수들도 있고, 2002년생 엄지성처럼 손흥민을 존중하는 선수도 있다.
취재진 카메라가 꺼지면 훈련장에 적막과 냉기가 돈다고 한다. 일부 선수는 ‘7번’ 뒤에 입에 담기 어려운 비속어를 붙여 부른다는 말까지 나온다.
최근 우즈베키스탄전 뒤 이강인의 반응이 지금의 공기를 보여준다. 대표팀 분위기를 묻자 그는 “어, 모르겠네요. 저도 잘”이라고 했다. ’손흥민이 A매치 59호 골 대기록을 세웠는데 한국축구 역대 최고선수로 봐도 되느냐’는 질문에 “그건 뭐 각자 알아서 생각해야 될 것 같다”고 했다.
수퍼스타와 라커룸의 충돌은 어느 팀에나 있다. 이보다 훨씬 심한 경우도 많다. 문제는 한국 대표팀의 갈등이 너무 오래 이어졌고, 해결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 9월22일'모레노호' 축구대표팀에 합류한 손흥민과 이강인 등 해외파 선수들이 충남 천안시 코리아풋볼파크에서 열린 공개훈련에서 자전거를 타며 몸을 풀고 있다. 왼쪽부터 이강인, 황인범, 황희찬, 이한범, 손흥민. 연합뉴스 사진 크게보기 지난 9월22일'모레노호' 축구대표팀에 합류한 손흥민과 이강인 등 해외파 선수들이 충남 천안시 코리아풋볼파크에서 열린 공개훈련에서 자전거를 타며 몸을 풀고 있다. 왼쪽부터 이강인, 황인범, 황희찬, 이한범, 손흥민. 연합뉴스
손흥민의 책임
주장 손흥민의 9년은 라커룸 내홍의 역사이기도 하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그 한가운데에 그가 있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선 손흥민 측 개인 트레이너가 공식 자격 없이 대표팀에 동행해 논란이 됐다. 2023년엔 김민재와의 SNS ‘언팔로’ 논란이 불거졌다.
2024년 카타르 아시안컵에선 준결승 전날 이강인과 몸싸움을 벌였다. 이른바 ‘탁구 게이트’다. 원인이 누구에게 있든, 팀 내 일을 라커룸 안에서 수습하지 못했다. 그 결과 대회 성적과 대표팀 이미지가 함께 무너졌다. 주장으로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올해 북중미 월드컵에선 인터뷰 보이콧 사태가 일었다. 일부 기자의 뒷담화에 대한 개인적 불쾌감을 팀 전체의 인터뷰 거부로 키웠고, 대회가 끝날 때까지 끌고 가면서 후배들의 반감을 샀다.
손흥민의 덕(德)은 그의 슈팅 능력만큼 뛰어나지 않은 것 같다. 카메라 앞과 뒤의 모습이 다를 때 후배들이 실망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냉정하게 말해 요즘 손흥민의 경기력은 예전 같지 않다. 최근 4경기에서 3골을 넣었지만 세트피스 의존도가 높았다. 공을 자주 빼앗기는 장면은 그라운드 위 동료들이 먼저 체감한다. 손흥민의 권위는 압도적인 실력에서 나왔다. 발끝이 무뎌지는 지금, 리더로서의 품격도 흔들린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대한민국과 포르투갈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16강 진출에 성공한 대표팀 황희찬(왼쪽부터), 황인범, 김민재, 나상호가 기쁨을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크게보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대한민국과 포르투갈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16강 진출에 성공한 대표팀 황희찬(왼쪽부터), 황인범, 김민재, 나상호가 기쁨을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96라인의 책임
그렇다고 96라인이 옳은 것도 아니다. 축구는 결국 공을 잘 차는 사람이 최고이고, 수퍼스타는 대개 이기적이다. 세계 정상급 골 결정력을 증명해 온 선배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96라인에겐 부족하다.
손흥민이 팀의 걸림돌이라고 믿었다면 결과로 증명했어야 했다. 북중미 월드컵 남아공전에서 손흥민·이재성이 선발에서 빠지고 96라인이 주축으로 뛰었다. 그 경기를 이겼다면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동기끼리의 지나친 결속도 문제다. 결속은 바깥에서 보면 파벌이다. 무엇보다 태극마크를 볼모로 ‘동반 은퇴’를 협상 카드로 꺼낸 건 자책골이다. 국가대표는 스스로 물러나는 자리가 아니라 부름을 받는 자리다. 게다가 셋 모두 손흥민과 함께 딴 2018년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병역 혜택을 받았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대의명분은 더 옹색해진다.
감정 관리도 서툴다. 세련된 이미지 관리에 능한 손흥민과 달리 번번이 급발진한다. 김민재는 3년 전에도 믹스트존에서 대표팀 은퇴를 시사하는 듯한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지난 2일 베네수엘라전에선 축구화를 집어던졌고, 방송 인터뷰에선 “수비수들이 불쌍하다”며 동료들을 공개 저격했다.
그러니 여론전에서도 판판이 깨진다. 노래 ‘퇴사할게요’를 비튼 ‘은퇴할게요’ 댄스 풍자 영상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 21일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용수 대한축구협회장 직무대행. 뉴스1 사진 크게보기 지난 21일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용수 대한축구협회장 직무대행. 뉴스1
가장 큰 책임은 협회에
가장 큰 책임은 갈등을 방치하고 키운 컨트롤타워, 대한축구협회에 있다. 협회는 “라커룸 일은 라커룸에서 풀어야 한다”며 일일이 간섭하기 어렵다고 피해왔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여론의 역풍을 두려워해 땜질 처방만 했고,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지금 대표팀은 임시 감독 체제에 협회장마저 공석인, 사실상 ‘무정부’ 상태다. 그런데도 당장 다음 달 소집 때 96라인을 부를지, 손흥민에게 계속 완장을 맡길지 결정해야 한다. 홍명보 전 감독도 지난해 주장 교체를 심각하게 고민했었다고 한다.
위대한 선수가 위대한 주장이라는 보장은 없다. 독일은 2010년 미하엘 발라크에서 필리프 람으로 완장을 옮겼고, 4년 뒤 월드컵 정상에 섰다. 8년 전 자카르타에서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건 네 사람이 다시 한 팀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누군가 완장의 주인을 바꿀지. 그 결단을 내릴 주체가 지금 한국 축구엔 보이지 않는다.
주장은 품지 못했고, 후배들은 존중하지 않았고, 협회는 지켜보기만 했다. 한국 축구 최고의 스타가 ‘7번’이 된 건 그 셋이 함께 만든 결과다.
박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