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을 빼려면 탄수화물을 끊어라” “세계보건기구(WHO)가 탄수화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탄수화물은 노화를 부른다”라는 말들이 몇 년 전부터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제는 ‘탄수화물 중독’이라는 표현까지 아무렇지 않게 쓴다. 한때 인류의 주된 에너지원이자 식탁의 중심이었던 탄수화물이 어느새 ‘건강의 적’으로 몰리고 있다.
최근에는 ‘탄수화물 중독 자가 진단’이라는 검사까지 온라인을 통해 퍼졌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만든 검사라는 말에 신뢰를 얻었지만, 실제로는 공식 문서나 논문 어디에서도 출처를 확인할 수 없다. 해당 기관이 제작했는지도 불명확하다.
자극적인 용어 ‘탄수화물 중독’
WHO가 경고한 대상은 ‘유리당’
끊는 게 아니라, 현명하게 골라야

‘중독’이라는 단어에는 엄격한 기준이 있다. 통제력 상실, 강한 갈망, 위험 상황에서도 지속적인 사용, 내성, 금단 증상 등의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단순히 빵이나 면을 좋아하거나, 탄수화물을 줄였을 때 허기가 느껴지는 정도로는 중독이라 할 수 없다. ‘탄수화물 중독’은 과학보다는 자극에 기댄 과장에 가깝다.
WHO가 정말 ‘탄수화물과의 전쟁’을 선포했을까? 아니다. WHO가 제한을 권고한 대상은 탄수화물 전체가 아니라 그중 일부인 ‘유리당(free sugars)’이다. WHO는 유리당 섭취를 하루 총열량의 10% 미만으로 줄일 것을 권장했을 뿐이다.
유리당에는 설탕·과당 같은 첨가당뿐 아니라 꿀, 시럽, 과일주스 등에 자연적으로 들어 있는 당류가 포함된다. 이런 당은 흡수가 빠르고 혈당을 급격히 높여 비만, 당뇨병, 심혈관질환 위험을 키운다. 비타민·미네랄·식이섬유 같은 영양소가 거의 없어 ‘빈 칼로리(empty calories)’로 불리며, 충치의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반면에 과일이나 채소를 통째로 먹을 때의 당은 유리당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식이섬유가 풍부해 당 흡수를 늦추고 혈당 상승을 완화하기 때문이다. WHO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줄여야 할 대상은 ‘탄수화물’이 아니라 ‘유리당’이다. 통곡물·채소·통과일 같은 복합 탄수화물은 건강과 장수를 위해 반드시 섭취해야 할 식품군으로 오히려 강력히 권장했다.
많은 사람이 체중 감량을 위해 탄수화물을 제한한다. 아쉽지만 이 방법의 초기 빠른 체중 감소는 체지방이 아닌 수분 손실에 따른 변화다. 탄수화물은 우리 몸에 글리코겐 형태로 1g당 약 3~4g의 수분과 함께 저장된다. 탄수화물 섭취를 급격히 줄이면 글리코겐이 고갈되면서 수분이 빠져 일시적으로 체중이 줄지만, 다시 섭취하면 곧 돌아온다.
중요한 목적은 단기 체중 변화가 아니라 장기 체지방 감량이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총 섭취 열량이 같을 때, 저탄수화물식과 저지방식의 장기적인 체중 감량 효과는 거의 차이가 없다. 저탄수화물식이 초기 몇 달 동안 약간 더 빠른 감량을 보이지만, 1년 이상 추적하면 그 차이는 사라진다. 문제는 저탄수화물식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식단을 1년 이상 유지하는 비율이 20~30% 수준에 그친다는 보고가 많다. 장기적으로는 식이섬유·비타민 B군·미네랄이 부족해질 위험도 있다. 결국 체중 감량의 핵심은 탄수화물을 얼마나 줄이느냐가 아니라, 총 섭취 열량을 얼마나 잘 조절하고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탄수화물을 얼마나 먹어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까? 미국 중년 성인 1만5000여 명을 25년간 추적한 연구에 따르면, 탄수화물 섭취와 사망 위험은 U자형 관계를 보였다. 전체 열량의 50~55%를 탄수화물로 섭취한 사람이 가장 사망 위험이 낮았고, 그보다 적거나 많으면 위험이 커졌다. 한국인 대상 연구에서도 50~60% 구간이 가장 낮았다. 탄수화물을 너무 적게 먹어도, 너무 많이 먹어도 수명에 불리할 수 있다는 결과다. 한국인 식사지침(KDRI) 역시 전체 열량의 55~65%를 탄수화물로 섭취하도록 권장한다.
탄수화물을 지나치게 줄이면 근육 손실 위험도 커진다. 탄수화물이 부족하면 단백질이 에너지로 전환돼 근육이 분해된다. 근육을 지키려면 탄수화물을 적절히 섭취하고, 충분한 단백질과 근력운동을 병행해야 한다. 근육은 단순한 힘의 상징이 아니라 대사 건강의 핵심이다.
탄수화물은 끊어야 할 적이 아니라, 똑똑하게 골라 먹어야 할 필수 영양소다. 설탕과 가공 음료 같은 유리당은 줄이고, 통곡물·채소·통과일 같은 복합 탄수화물을 중심으로 식단을 구성하자. 흰쌀밥보다 잡곡밥을 선택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지방은 불포화지방 위주로, 단백질과 식이섬유, 비타민·미네랄을 충분히 챙기는 것이 건강의 핵심이다. ‘탄수화물과의 전쟁’이 아니라, 탄수화물과의 ‘균형 잡힌 동행’이야말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길이다.
오상우 동국대 일산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아바타: 불과 재', 韓서 제일 먼저 본다..12월 17일 전세계 최초 개봉 [공식]](/_next/image?url=https%3A%2F%2Fres.cloudinary.com%2Fdzatyjuhh%2Fimage%2Fupload%2Fv1763081660%2Fupload%2F202511071823777179_690dbca1101b7.jpg&w=128&q=75)